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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조각 모음

World Defragmentation

by. 김강리 (독립기획자)


1.
 브라운관이라고도 불리는, 뒤통수가 뚱뚱한 CRT모니터를 사용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 버지께서 컴퓨터를 켜놓고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몰래 들여다본 모니터에서 는 이리저리 흩어진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색종이 조각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차례의 관찰 끝에, 이 조각들이 색깔 별로 모이면 아버지가 자리로 돌아온다는 규칙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야 이 작업을 ‘디스크 조각 모음(Disk Defragmentation)’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디스크 조각 모음은 하드디스크에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저장된 데이터를 통합하여 컴퓨 터의 처리 속도를 향상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운영체제에는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동명의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그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드디스크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하드디스크는 데이터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방식으로 플래터(platter)라고 부르는 금속 원판에 기록한다. 저장된 데이터 중 일부가 삭제되면 그 영역은 텅 빈 채로 있게 되는데, 새로운 데이터를 입력할 때 그 부분을 우선으로 채운다. 새로운 데이터가 삭제된 데이터보다 용량이 큰 경우에는 데이터를 두 개 이상으로 조각내어 기록하는데, 그 결과로 데이터의 조각이 각기 다른 위치에 저장되는 것을 단편화(fragmentation)라고 부른다. 데이터의 단편화가 진행될수록 하드디스크의 처리 속도가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하드디스크가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플래터가 회전하면서 헤드(head)가 해당 데이터의 위치로 이동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데이터가 단편화되어 있는 경우에는 부품이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구간이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드디스크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데이터의 조각을 한 데 모아주는 디스크 조각 모음을 주기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존재를 지우고, 다른 것으로 채우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파편을 한 데 모으는 디스크 조각 모음. 거니림(GunyLim)의 작업이 작동하는 방법은 디스크 조각 모음의 프로세스를 닮았다. 그의 작업에서는 ‘입력-삭제-재입력-조각 모음’의 전체 혹은 (전 과정을 떠올리게 하는) 일부 단계가 나타나는데, 이 글에서는 비둘기로부터 출발한 개인전 《□, ◣》(챔버1965, 2023)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1단계, 입력. 노아의 방주에 잎사귀를 물고 온 이래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로 일컬어 졌다. 때문에 평화를 기치로 내건 올림픽 개회식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전통이 있기도 하다. 19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흰 비둘기 2,400마리를 날렸는데, 이는 국내에서 비둘기의 개체수가 급격히 증가한 계기가 되었다.
 2단계, 삭제. 그러나 도시에서 비둘기는 곧 골칫덩이가 되었다. 도시에서 비둘기는 깨끗한 물과 먹이를 찾기 힘들어 인간이 내다버린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야 했고, 바위틈이나 절벽이 없어 교각 이나 실외기 위에 둥지를 틀어야 했기 때문이다. 비둘기가 인간의 생활 반경 안으로 들어오면서, 배설물이 건물을 부식시키거나 깃털이 미관을 해친다는 민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009년, 환경 부는 집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했다.
 3단계, 재입력. 인간은 난간과 실외기 등에 비둘기가 앉지 못하도록 아주 뾰족한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버드 스파이크’라 불리는 이 조형물은, 조류 착지 방지라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비둘기를 살해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2014년에 안전한 조류 착지 방지 장치가 특허청에 등록되기도 하였으나, 버드 스파이크가 저렴한데다가 구하기도 쉽다는 이유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4단계, 조각 모음. 거니림은 비둘기를 쫓아내기 위해 둔 버드 스파이크를 직접 사용하거나, 그 뾰족한 형태를 빌려와 작업한다. 이를테면, 《□, ◣》는 버드 스파이크와 그 형태들의 집합이었다. 전시의 가장 마지막 순간[도1]에 위치한 브라운관에서는 비둘기의 사체를 쪼아 먹는 까마귀들과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비둘기의 모습이 각각 상영되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둥글게 말아 천장 까지 쌓아올린 투명한 버드 스파이크와 그를 둘러싸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시커먼 조형물이 있었다.
 《□, ◣》은 《비둘기 쫓아내기》(공간파도, 2022)와 《혐오의 출발점》(별관, 2022)을 거치며 심화된, 혐오의 메커니즘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적극적으로 드러난 전시였다. 거니림은 최근 작업의 대상이 되는 비인간 주체의 범주를 확장하고 있는데, 《버즘나무의 고사(枯死)》(미학관, 2023)에서는 ‘플라타너스’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가로수를 소재로 삼은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벌목(삭제)된 가로수에 주목한 연작〈껍질 속〉(2023)[도2]를 선보였다.

2.
 거니림의 작업은 아주 기본적인 도형에서 출발한다. 특히, ‘사각, 삼각’이라고 읽는 《□, ◣》의 제목은 그가 ‘플라톤의 도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삼 각형과 사각형이 자연을 이루는 기본 입자이며, 이들을 조합하여 만든 정다면체가 불, 흙, 공기, 물과 대응한다고 주장했다.
 양자역학을 창안한 하이젠베르크의 어깨 위에 선 우리에게, 플라톤이 설파한 기하학적 물질관에 기초한 작업은 지금/여기를 정확히 짚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케케묵은 고대의 세계관. 그러나 미니멀리스트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거니림의 작업을 검토할 때, 형태적 단순성이 우리가 지금/여기 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 장의 평평한 사각형 합판으로 구성된 무미건조한 작품 〈무제(널빤지)〉(1968)[도3]를 제작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1931-2018)는 조각을 게슈탈트(Gestalt)적 사물이라 했다. 게슈 탈트는 부분의 합으로서 전체가 아니라, 완전한 구조와 총체성을 지닌 통합된 전체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작품에 대한 모든 정보는 게슈탈트로서 소진된다.”1) 시공간을 초월하여 환영적인 세계를 관조하도록 감상자를 이끄는 재현적인 작품과 달리, 전체적인 모양을 즉시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미니멀리즘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크기, 비례, 재료, 표면 등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즉물적 인 경험을 하게 된다.
 또한, “형태의 단순함을 경험의 단순함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단일한 형태는 (작품에 대한 관객의) 관계들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것들을 요구한다.”2) 이를테면, 칼 앙드레(Carl Andre, 1935-2024)의 〈등적 I-VIII〉(1966)[도4]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전시장에 배치된 120개의 하얀 벽돌 사이를 걸어 다녀야 하는데, 이로써 우리는 작품과 공간, 자신의 육체를 등질적으로 경험하며 지금/여기에 붙잡힌다.
 비평가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 1939-)는 「미술과 사물성(Art and Objecthood)」 (1967)에서 의미의 위치가 작품 내부에서 작품과 공간, 감상자가 맺는 관계로 이동한다는 점에서 미니멀리즘 미술이 연극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미니멀리즘이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이 위치 한 실제의 상황에 관심을 두게 한다는 점에서 ‘회화를 가장 회화답게 하는 회화의 본령’이 무엇인 지를 고민하였던 모더니즘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프리드가 지적한 바로 그 지점에서, 거니림의 작업이 담고 있는 그 내용과 형식이 만난다. 내용 적으로 ‘입력-삭제-재입력-조각 모음’을 통과하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원리와 그 과정을 밝히고자 했다면, 형식적으로 미니멀리즘의 전략을 모방한 사물의 현전(presence)으로 우리를 현실에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세계의 아주 기본적인 작동 원리 인 혐오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단순한 형상으로 표현하여 우리가 그 상황을 직면하도록 하였다.

3.
 《□, ◣》의 가장 깊은 곳[도1]으로 되돌아가자. 땅에서 솟아오른 검은 원뿔 모양의 〈버드스파이 크 II〉(2022) 사이로, 〈본질을 잃고 점점 강해지는 마음〉(2022)이 기둥처럼 서있다. 여섯 층으로 이루어진 이 기둥의 표면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침이 뾰족하게 돋아나있다. 층과 층 사이에서는 세 개의 아주 작은 검은 원뿔이 지탱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몸을 우측으로 틀면, 세로로 쌓아올린 두 개의 브라운관이 보인다. 이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으로 처리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위에서는 까마귀 두 마리가 비둘기의 사체를 쪼아 먹는 장면이, 아 래에서는 버려진 화분 위에 누군가 올려둔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헤집는 비둘기의 모습이 20초 안 팎의 짧은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
 브라운관의 맞은편에는 무미건조한 도형들이 놓여있다. 투명한 유리구슬 위에 기다란 직육면체가 비스듬히 얹혀있기도 하고, 하얀 삼각기둥을 옆으로 눕히자 드러난 비탈에 검은 육면체가 놓여 있기도 하다. 쉼표를 기준으로 앞의 것은〈비스듬한 직육면체〉(2022), 뒤의 것은〈부분과 전체〉(2022)라 부른다.
 이 현장에 나타난 도형들은 앞서 그 재질을 특별히 언급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석기(stoneware)로 제작된 것이다. 석기는 도기(Earthenware)와 자기(Porcelain) 사이의 것으로,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점토를 주성분으로 한다. 대체로 투광성이 없으며, 경도가 높다는 특징을 가 진다. 아주 견고한 이 도형들은 전시장에 무심하게 놓여있다.
 전시장에 들어선 감상자가 어떤 도형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도형의 곁을 밟아야 한다. 직육면체, 구(球), 원뿔, 삼각기둥, 원기둥……. 이들의 단순하고도 명료한 형태는 한 눈에 포착된다. 그리고 한 눈에 보이는 이 상황은, 곧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 된다. 지금 / 여기에서 나를 위협하는 저 뾰족한 것을 보라 .
 이 사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감각하게 한다. 하나의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혐오의 세기에, 작가는 그 존재가 처한 현실을 한 데 모아두었다. 거니림은 혐오의 매커니즘이라는 근 본적인 문제를 가장 기본적인 도형을 통해 사유함과 동시에 그를 감각하게 한다. 이에 그의 작업을 일종의 ‘세계 조각 모음’이라 부르고자 한다.




1) Characteristic of a gestalt is that once it is established all the information about it, qua gestalt, is exhausted.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Artforum, February 1966, 44.
2) Simplicity of shape does not necessarily equate with simplicity of experience. Unitary forms do not reduce relationships. Robert Morris, ibid., 44.

참고문헌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Artforum , February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