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과 균열에서, 어둠을 응시하는 이에게
by. 한주옥 (독립큐레이터, 비평)
a.
“왜 도자를 매체로 작업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작가 거니림은 이렇게 되묻는다. “가령 잡초나 비둘기, 돌멩이처럼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지만, 시선에서 외면되거나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관심에서 소외된 것들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는가? 단순히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대신 그 존재 자체로 이해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말이다. 자연을 지각하고 존재의 본질을 발견하는 경험은 단지 외부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감정을 투영한 결과만은 아니다. 또한, 주관적 상상과 관찰의 산물로만 한정 지어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작가의 오랜 사유를 담은 이 질문에 단번에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겉으로는 모순 없이 공존하는 것들이 실은 서로의 존재를 지배하거나 소외시키며, 엄격히 분리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오랫동안 인간의 의식과 사회 구조의 난맥 속에서, 주체와 객체, 인간과 자연, 영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여러 요소 사이에서 이원론적 관성에 의해 유지되어 오지 않았던가. 이성과 과학의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주체’와 수동적으로 사유되는 ‘대상’을 뚜렷이 구분해 왔으며, 이러한 구분은 우리가 생성하는 지식 체계와 존재의 패턴을 더욱 부각시켜왔다는 점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다. 반면, 사물과 자연의 주체성을 재고하며 그 내재된 가치와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인식의 전환이 활발히 제기되고 있다. 이 논의의 연장선에서 작가의 앞선 질문과 이번 전시의 작업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틈과 균열 속에서 발견할 결속의 가능성이자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실천을 살피는 것이다. 여러 차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단어를 언급했던 작가의 의도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요구하는 동시에 각 존재가 발화하는 고유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독특한 질감에 촉수를 세우며 세밀하게 감각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아도르노(Theodor Adorno)는 그의 저서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인간과 사물에 대한 기존의 도구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을 넘어, 사물과 현상이 지닌 고유한 가치를 ‘구원(Erlösung)’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을 논한 바 있다(Adorno, 2005: 325). 그의 비판적 이성과 미적 경험에 관한 입장은 사물과 현상의 경계를 이해하는 메시아적 접근에 가까운 구원이 절망으로 가득한 현실에서도 고유한 의미를 모색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적인 과거의 관념을 거슬러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생동하는 맥락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니림은 역설적인 세상의 모습에 질문하고, 최초의 단계를 밝혀내는 거울처럼 존재와 흔적을 형상화한다. 그는 시간과 기억을 담아내고, 연쇄적 감각을 통해 대상의 속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한다. 깊은 계곡의 어둠 속에서도 교환하는 시선을 찾아내듯, 세상의 틈과 균열을 까발려 낯설고 왜곡된 모습을 포착한다. 그리고 무거운 바위처럼 단단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성찰을 통해 축적된 사유가 하나의 형상으로 응고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치 흙이 빚어지고 고온에서 구워지는 절차를 거치듯 고요한 변화 속에서 창발한다. 짐작컨대 도자는 그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일 것이다.
b.
이번 전시에 맞추어 출간한 저서 『노루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도주뿐이다』(2024)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작가는 제주도에 서식하는 노루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 예술곶산양 레지던시에서 지난 9개월간 다양한 자연적, 사회적 현상들을 관찰하며 불협화음이 흐르는 장면과 기류를 포착하여, 이를 토대로 작업 전반을 진단하는 사유를 전시의 문맥으로 형성한다. 따라서 전시를 구성하는 각 작품의 매체적 특징과 특정 서사는 노루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도자 외에도 회화, 드로잉, 영상 등 다양한 매체와 형식이 조화롭게 결속한다. 더불어 작가의 지난 개인전 《버즘나무의 고사 枯死》(미학관, 2023)와 《사각, 삼각》(챔버 1965, 2023) 그리고 《무늬, 주름으로 만든 기원》(임시공간, 2024) 등의 전시에서 다룬 다양한 주제와 관점을 연계하며 노루의 생태적 위치와 삶을 둘러싼 리서치를 응용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 교차하는 인간의 신념, 사회적 합의 등 비판적인 사고방식을 본격적으로 시각화한다.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작가의 비언어적 표명과 제주에서 경험한 노루의 이미지가 기록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 역시 다양한 생태적 문제들이 존재하지만, 노루는 이곳에서 더욱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작가의 리서치에 따르면, 노루는 제주에서 흔히 발견되는 종이지만, 유해 동물로 지정된 이후, 2020년까지 11년 동안 전체 개체 수의 73%인 9,300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결과 노루의 개체 수는 회복되지 않은 채, 제주는 더 이상 노루의 생태가 유지되는 장소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노루의 존재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작가의 작업에서 마치 고대의 화석을 발굴하듯 과거의 순간과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며, 반성적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으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서 노루의 존재는 단순한 그림이나 글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의미로 번역된다. 따라서 형태가 불분명하거나 시야에서 흐릿한 노루 사체를 묘사한 40여 점의 <제주노루>(2024) 드로잉 연작과 광목천 위에 그린 <죽은 노루>(2024)는 실제 제주의 생태적 맥락을 반영한 아카이브이자 기록으로 기능하며, 작가는 이를 마치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실재를 붙잡아 내듯 노루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낸다. 바닥에는 세 개의 핸드폰이 배치되어 있으며 화면에는 <내가 노루를 보면 노루도 나를 본다>(2024) 작품의 영상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낮춰 감상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변화된 환경에 몰입하게 된다. 작가는 그간 노루와 만남을 노트, 사진, 영상 등으로 기록하며, 이 과정에서 심리적 및 물리적 거리를 좁혀간다. 그것은 비인간 세계와 소통하는 인위적이면서 동시에 자연스러운 절차였을지 모른다. 작가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자연 그리고 비인간 존재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그들의 존재를 깊이 탐구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노루는 단순한 감상 대상이 아니라 시선을 매개하는 뚜렷한 존재이자 상태로 응결한다.
한편, 작가는 돌로 쌓아 만든 제주의 독특한 문화인 방사탑(防邪塔)을 목격하고 이를 시각적 언어로 해석한다. 제주에는 다양한 액막이 방술(方術) 의식이 존재하며, 방사탑 또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재앙을 막는 수호 기능을 지닌다. 이는 다른 지방의 장승이나 솟대가 가지는 의미와 유사한 맥락을 공유한다. 작가는 그간 천작해온 도자 작업의 매체적 방법론을 통해 직관적으로 탑의 형태를 분석하고, 그 구조적 얼개를 구성하여 신념이 작용하는 방식을 현재의 시간 속에서 새롭게 갱신한다. 전통적인 지식에서 비롯된 탑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는 <방사탑>(2024)은 주술적이며 영속적인 의미를 지닌 오브제로 변모한다. 작품은 성인 손바닥 크기의 삼각기둥 57개가 수평축으로 둥글게 자리 잡은 삼각형 조각물의 토대 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차곡차곡 수직축을 향해 쌓여 올라가는 형상을 이룬다. 각각의 조형물은 흙을 구워 건조 시킨 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현무암 가루를 발라 마감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작업을 위해 구매한 현무암을 직접 부수고 갈아 미세한 입자로 만드는데, 작가의 언급을 빌리자면 이는 “대지가 작은 입자로 변화하는 침식”의 과정으로 인식되며 물리적 조건 속에서 작동하는 맥락과 적극적으로 호흡하는 생명의 흐름을 체험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방사탑>은 탑의 외형을 띠지만, 그 안에는 독립된 형상의 가치, 즉 순환의 과정이 흐르게 된다.
c.
작가의 대답 끝에는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며,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연결하려는 오늘날의 흐름 속에서 생태적 감수성과 더불어 지속 가능한 관계를 탐색하는 움직임이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동시대 도자와 조각의 매체를 경유하며 미술의 유효성을 묻고, 동시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예리하게 살피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어떤 울림으로 다가올까? 도자를 매체로 작업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 대화가 끝날 무렵, 작가와 필자는 서로의 문답을 각각의 면이 맞물리는 삼각형을 만드는 과정에 비유했다. 이는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드러나는 상징적 구조, 특히 삼각형을 연상시키는 형태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투박한 선과 흑백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진 화면 안에서. 손가락으로 흙을 빚어 각기 다른 질감을 부여하는 손길과 숨결로 완성된 탑의 형상에서, 테두리와 껍질만 남아 형태를 추적하기 어려운 이미지와 오브제들이 중첩된 세계 속에서, 미묘하게 서로 연결된 순환의 알레고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생태학자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생명에 기반한 사고를 '기호'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관점을 교차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와 너, 이곳과 그곳을 넘나드는 작가의 마법 같은 기호는 생명체 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연관성을 헤아리는 중요한 기호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린다. 그리고 그 희미한 감각은 점점 더 또렷해질 것이다.
a, b, c의 각 변이 연결되어 하나의 총체적 구조를 이루는 과정을 떠올려본다. 우리는 어떤 사유를 엮어가며, 그 안에서 새로운 다짐과 변화를 응시할 수 있을까?
1) 거니림, 『노루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도주뿐이다』, 세 개의 고리, 2024, p.49.
2)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사월의 책, 2018, 참고